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스트팔렌 조약 (문단 편집) == 의의와 영향 == || [[파일:Europe_map_1648_kor.png|width=100%]] || [[파일:2283px-Holy_Roman_Empire_1648.svg.png|width=100%]] || ||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유럽(1648년) ||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(1648년)[br]우측 하단의 비고[br]{{{#!folding [ 펼치기 · 접기 ] ||[[자유도시]] || ||주교령(교회령) || ||[[팔츠 선제후국]]의 [[비텔스바흐 가문]] || ||[[바이에른 선제후국]]의 [[비텔스바흐 가문]] || ||[[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]]의 [[호엔촐레른 가문]] || ||[[프랑켄]]의 [[호엔촐레른 가문]] || ||[[베틴 가문#s-4|알브레히트계 베틴 가문]] || ||[[베틴 가문#s-3|에른스트계 베틴 가문]] || ||[[올덴부르크]] || ||[[합스부르크 제국|오스트리아]]의 [[합스부르크 가문]] || ||[[압스부르고 왕조|스페인의 합스부르크 가문]] || ||[[뷔르템베르크]] || ||헤센-카셀 ||}}}{{{#!wiki style="" ||흔히 [[이탈리아 왕국(중세)|북이탈리아]]를 잃은 것으로도 묘사되지만, 베스트팔렌 조약의 내용에는 북이탈리아의 독립이 언급되어있지 않다. [[이탈리아 왕국(중세)]] 문서 5번 문단 참조. ||}}} || 이 조약은 근대적인 개념의 외교회의를 통해 이루어진 [[조약]]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. [[전쟁]]에서 이긴 나라가 패전국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해서 체결된 조약이 아니라, 관련 국가들이 참석한 외교 회의를 토대로 이루어낸 조약인 것. 또한 [[중부 유럽]]에 국가 주권 [[개념]]에 기반을 둔 새 [[질서]]를 세웠다는 점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. 또한 상호 독립적인 주권국가가 자신의 의사만으로 [[외국]]과의 [[동맹]] 등 조약을 체결할 [[권리]]를 인정받았다는 점에서, 이 조약을 근대 [[국제법]]의 시작으로 보며, 이후 국제법은 꾸준히 발전했다.[*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국제법은 [[고대 로마]]의 만민법(Jus gentium)이다. 이는 시민법(Jus civile)와 대비되는 법으로 [[이민족]] 간의 또는 로마와 이민족 간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었다.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 만민법은 로마의 국내법이고, 국가 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오늘날의 국제법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, 특징은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았다. 하지만 만민법을 [[근대]] 국제법의 시작으로 보지는 않는데, 그 이유는 [[고대]] 로마의 만민법에 의한 법질서가 [[중세]]를 거치면서 단절되었기 때문이다.] 이 외에도 조약을 통해 '[[종교의 자유]]'를 법적으로 보장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으며, [[교황]]이 [[황제]] 위에 군림하던 중세적 질서를 그 틀까지 완벽하게 끝장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. 그리고 이는 [[19세기]]에 이르러 일반 민중의 생활규범이 종교적 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 [[세속화]]를 달성하는 데까지 이른다. 이 조약 이후로 [[종교]]나 특정한 [[이데올로기]]를 바탕으로 [[유럽]] 전체 같은 질서를 요구하는 일은 사라지게 되었으며, 본격적으로 세력 [[균형]]이 유럽의 [[외교]]를 결정짓는 잣대로 자리잡게 되었다. 이 조약을 통해 스위스와 네덜란드가 [[독립]]했으며, 특히 네덜란드는 이후 [[네덜란드 동인도 회사|동인도 회사]]로 대표되는 [[상업]]의 발달을 통해 100여년 간의 [[전성기]]를 맞았다. 이 조약의 가장 큰 수혜자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는 남부 알자스 등의 영토를 얻었고, 다른 국가들이 전부 전쟁으로 인구가 감소한 마당에 홀로 큰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다는 호재가 겹쳐 이후 [[프랑스 혁명]] 이전까지(좀 더 넓게 보면 [[나폴레옹 전쟁]] 무렵까지) 유럽의 최강국으로 군림하는 기반을 마련했다. 스웨덴 역시 [[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#s-2.2|영]][[브레멘|토]]를 포함한 여러 이익을 얻어 [[북유럽]]의 패자가 되었다. [[카를 5세]] 이래 유럽 최강국의 지위를 유지하던 스페인은 이 시점에서 몰락했고,[* 다만 이는 최강 열강의 자리에서 내려왔다는 이야기이지 흔히 알려진 것처럼 스페인이 이 시기를 기점으로 완전히 나락으로 처박혔다는 뜻은 아니다.] 신성 로마 제국은 제후들의 [[주권]]이 보장됨에 따라 오스만 제국과 맞서 싸우는 경우처럼 기독교 모두가 단결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황제의 권위가 내세워지는 것을 제외하고는 실질적으로 반쯤 해체라고 해도 무방한 상황이 되었다.[* 다만 그렇다고 황제의 권위가 완전히 무너진 건 아니다. ] 신성 로마 제국의 사실상의 세습왕가였던 [[합스부르크 가문]]은 이 시점에서 [[제후국]]에 대한 영향력을 상당수 상실하게 되었고, '[[본토]]'라고 할 수 있는 [[합스부르크 제국]][* [[오스트리아 대공국]], [[보헤미아 왕국]], [[헝가리 왕국]], [[크로아티아 왕국]] 등.]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확장의 방향을 [[이탈리아 반도|이탈리아]]와 [[동유럽]]으로 돌렸다. 한편, [[합스부르크 가문]]을 대신하여 전쟁의 피해가 비교적 적었던 [[프로이센 공국]][* 본토인 [[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]]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었다. 수도인 [[베를린]]도 마찬가지.]에서 이후 [[독일 제국]]의 전신이 되는, 개신교도인 [[호엔촐레른 가문]]의 [[프로이센 왕국]]이 새로이 부상했다. 이러한 이유들과 30년 전쟁을 통해 전 [[국토]]가 황폐화되었고 인구의 1/3이 쓸려나간 독일 지역은 이후 [[프로이센 왕국]]이 부상하기 전까지 이리저리 치이는 신세가 되었다. 그래서 프랑스의 [[독일어권]]에 대한 무시는 더욱 심해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